유럽 항공망이 다시 한번 지정학적 충격에 흔들리고 있다. 중동에서 전쟁이 격화된 뒤 공역 폐쇄와 물류 차질이 겹치면서, 항공사 운영의 전제가 되는 항공 연료 조달이 불안정해졌다는 진단이 잇따른다. 특히 원유와 정제 연료의 핵심 해상 통로로 꼽히는 호르무즈 해협 상황이 악화되자, 유럽의 공항 단체는 수주 내 ‘시스템적’ 공급 부족 위험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항공편 결항이 당장 현실화하지 않더라도, 연료 가격 급등과 항공기 우회 운항이 겹치면 항공권·화물 운임, 연결편 스케줄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이번 경고의 배경에는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본격화한 전쟁이 있다. 유럽 항공안전청(EASA)은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걸프 지역 일부 상공에서 유럽 항공사의 운항을 금지했고, 이 제한은 24일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차질이 더해지면서 연료 수급은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라 ‘운항 가능성’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업계는 EU 차원의 긴급 대응이 없으면 이번 충격이 항공 산업 전반의 에너지 위기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유럽 공항 업계 ACI Europe “수주 내 항공 연료 공급 부족” 경고
유럽 공항 협의체 ACI Europe(Airports Council International Europe)은 호르무즈 해협의 물류 흐름이 정상화되지 않을 경우, 유럽이 3주 내 ‘시스템적’ 항공 연료 공급 부족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항공 연료는 항공사별 계약, 공항 내 저장 능력, 지역 정유·운송 인프라에 따라 여유분이 크게 달라, 특정 허브에서 병목이 발생하면 주변 공항으로 파장이 번지는 구조다.
현장에서는 작은 변화도 즉시 운영 부담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처럼 환승 수요가 큰 공항은 일정이 촘촘해 연료 공급이 흔들릴 때 ‘탑재량 조정’이나 ‘급유 공항 변경’ 같은 우회 운영이 늘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은 항공기가 더 먼 공항으로 이동해 급유하도록 만들거나, 탑재 화물을 줄여 연료를 싣는 선택을 강요해 화물 운송 능력과 수익성을 동시에 압박한다. ACI Europe의 업계 경고는 이 같은 운영 리스크가 한두 공항의 문제가 아니라 네트워크형 충격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을 겨냥한다.

A4E가 EU에 긴급 대응 촉구 “연료 수급 모니터링과 제도 완화 필요”
유럽 주요 항공사 단체인 A4E(Airlines for Europe)는 14일(현지시간) 로이터 보도에서, EU에 긴급 조치를 요청했다고 전해졌다. 요구사항에는 연료 수급 모니터링 강화, 항공 탄소시장 관련 제도의 한시적 조정, 항공 관련 세금 부담 완화 등이 포함됐다. 전쟁으로 공급망이 흔들리는 국면에서 비용 급등을 그대로 떠안으면, 항공사들은 노선 유지보다 감편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논리다.
업계가 특히 주목하는 제안은 EU 차원의 등유(항공유) 공동 구매다. 이는 2022년 러시아의 가스 공급 축소 이후 EU가 추진한 공동 천연가스 구매 모델과 유사한 접근으로, 단일 시장의 협상력을 활용해 조달 불확실성을 낮추자는 취지다. 다만 항공유는 정유·물류·품질 규격이 촘촘히 얽혀 있고, 국가별 세제와 비축 체계도 달라 실제 실행까지는 높은 조정 비용이 따른다. 그럼에도 A4E가 이 카드를 꺼낸 것은, 현 상황을 단순한 가격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 에너지 위기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A4E는 EU의 ‘90일 비상 석유 비축 의무’에 항공유를 명시적으로 포함하도록 법 개정을 요구했다. 항공유가 비축 의무의 ‘사각지대’로 남을 경우, 위기 때 공항과 항공사 운영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전쟁으로 인한 공역 폐쇄와 운항 차질을 슬롯 제도의 ‘정당한 미사용’(JNUS) 사유로 인정해 달라는 요청도 같은 맥락이다. 슬롯을 잃을 위험이 줄어야 항공사들이 불가항력 상황에서도 장기 노선 전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논의의 배경에는 EASA의 운항 제한 조치가 있다. 걸프 지역 일부 상공 운항 금지는 항공기의 우회 항로를 늘리고, 비행 시간이 길어지면 연료 소비가 증가한다. 결국 공급망의 불안정이 수요 측 압력까지 키우는 셈이며, 다음 단계는 공항 현장의 실제 급유 차질로 번질 수 있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항공 산업의 탈탄소 전략도 흔들 “SAF 비용과 공급 부족이 변수”
연료 공급 충격은 친환경 전환에도 직격탄이 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델타항공(Delta Air Lines)은 지속가능성 페이지에서 ‘2030년까지 연료의 10%를 SAF(지속가능항공연료)로 대체’ 목표와 ‘2050년 넷제로’ 목표를 삭제하거나 표현을 완화했다. 델타는 SAF가 탈탄소의 핵심 수단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공급 부족과 기술 발전 지연이 목표 달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SAF는 폐기물·폐식용유 등으로 생산돼 기존 항공유 대비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지만, 가격이 통상 기존 연료보다 2~5배 비싸 상용화 속도가 더디다. 전쟁과 해상 물류 차질로 전통 연료까지 불안해지면, 항공사 입장에서는 ‘비싼 SAF 확대’보다 ‘당장 확보 가능한 연료’가 우선순위로 밀려나는 구조가 된다. 이 딜레마는 유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윌리 월시 사무총장은 2월, 신형 항공기와 대체 연료 부족이 산업 목표 달성을 위협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IATA 소속 약 350개 항공사는 2021년 항공 부문 배출(전 세계의 2~3%) 감축을 위한 공동 목표를 채택했지만, 최근 공급망 차질로 항공기·엔진 도입 지연이 이어지며 계획에 부담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의 항공사들도 같은 압력을 받는다. A4E에 포함된 루프트한자, 에어프랑스 KLM, 이지젯 같은 대형 사업자들은 운항 제한과 연료 가격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며 수익성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EU 집행위원회가 22일 에너지 시장 충격 완화 패키지를 발표할 예정이지만, 항공유에 대한 구체 조치가 포함될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위기는 ‘단기적 에너지 확보’와 ‘장기적 탈탄소’ 사이에서 유럽 항공 산업이 어떤 우선순위를 택할지 시험대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