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가 차기 대선 국면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유권자들의 시선은 경제 공약보다도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느냐’는 질문으로 쏠리고 있다. 최근 수년간 대통령 교체와 의회 갈등이 반복된 가운데, 일상에서 체감되는 치안 불안과 고질적인 부패가 이번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리마의 상인과 택시기사, 지방 도시의 자영업자들까지 “밤에 문을 닫는 시간이 앞당겨졌다”거나 “행정 절차마다 뇌물 요구가 따라온다”는 식의 경험을 공유하며, 국가의 통치 역량과 공공 정책의 신뢰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이 1980~2000년대 반군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소탕 과정에서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군·경 인사들을 사면하기로 한 결정이 더해지며, 페루의 정치와 사회는 ‘안보’와 ‘정의’의 충돌이라는 오래된 난제를 다시 마주하고 있다.
페루 대선 판세를 흔드는 부패와 치안 문제의 결합
이번 대선에서 부패와 치안은 따로 떨어진 의제가 아니라, 서로를 증폭시키는 하나의 문제로 작동하고 있다. 범죄가 늘어날수록 경찰·검찰·지방정부의 대응 역량이 도마에 오르고, 그 과정에서 권력형 비리 의혹이 함께 제기되면서 국가 신뢰가 더 빠르게 훼손되는 구조다.
정치권의 불안정도 이런 악순환을 키웠다. 페루는 최근 10년 동안 대통령이 잦게 교체되며 국정 연속성이 흔들렸고, 그 틈에서 공공안전과 반부패 시스템은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만 커졌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누가 성장률을 높일 수 있나”보다 “누가 기본 질서를 지킬 수 있나”가 더 현실적인 선택 기준이 되고 있다.
리마 도심에서 소규모 전자기기 매장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절도와 갈취가 반복되면서 ‘사업 리스크’가 아니라 ‘생존 리스크’로 변했다고 말한다. 이런 체감은 곧장 선거의 표심으로 이어지고, 후보들은 치안 강화와 공직기강 확립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볼루아르테의 사면 결정과 국제사회의 비판, 선거 쟁점으로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대통령 권한에 따라 1980~2000년 반군 소탕 작전에 투입됐던 군인과 경찰관을 대상으로 한 사면 조치를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가가 “조국의 수호자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내며, 폭력에 맞서 싸운 이들의 희생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당시 작전 과정에서 제기된 민간인 대상 범죄 의혹과 맞물리며 거센 반발을 불렀다. 페루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2003년 보고서에서 전국적으로 5300명 이상의 여성이 성적·정신적 학대를 겪었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힌 바 있다. ‘빛나는 길’과 정부군의 충돌이 내전에 가까운 양상으로 번지면서 약 7만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기억의 상처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국제사회도 비판 수위를 높였다. 미주기구(OAS) 산하 미주인권위원회(IACHR)는 관련 성명에서 이번 조치가 600건 이상의 재판 절차를 멈추게 하거나 기존 선고를 뒤집을 수 있다고 지적하며, 피해자들의 사법 접근권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논쟁은 단순한 과거사 논란이 아니라,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법치와 인권, 안보를 조정할지에 대한 정책 대결로 번지고 있다.
이 같은 갈등은 곧장 대선의 언어를 바꾼다. 치안 강화가 ‘강경책’으로만 읽히는 순간, 인권과 책임 추궁의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반대로 과거사 책임을 강조하면 “오늘의 범죄를 막을 해법이 있느냐”는 질문이 뒤따른다. 결국 유권자들은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라 ‘어떤 질서가 더 지속 가능한가’를 저울질하게 된다.
역대급 후보 난립 속 페루 선거 전략, 디지털 공간에서 갈라지는 표심
페루 정치는 다수 후보가 경쟁하는 구조가 반복되며, 1차 투표에서 승부가 나지 않고 결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후보가 많을수록 메시지는 더 자극적으로 쪼개지고, ‘부패 척결’과 ‘치안 회복’ 같은 키워드는 누구나 외칠 수 있는 구호가 된다. 결국 차이는 실행력의 증거, 즉 과거 경력과 연합 구성, 의회와의 협상 능력에서 갈린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공간의 영향력은 더 커지고 있다. 후보들은 TV 토론만큼이나 소셜미디어 라이브, 짧은 영상, 메신저 기반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반대로 의혹을 공격하는 네거티브도 빠르게 확산된다. 특히 부패 의혹이나 치안 실패 사례처럼 감정적 반응을 부르는 이슈는 사실관계 검증보다 속도가 앞서기 쉽다는 점에서, 플랫폼의 역할과 언론의 검증 경쟁이 동시에 중요해지고 있다.
리마의 한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후보 발언을 실시간으로 캡처해 공유하며 “무엇을 말했는지”뿐 아니라 “이 말이 실행 가능한지”를 따져 묻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불신이 큰 사회일수록 정보 소비가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공약 경쟁이 아니라 신뢰 경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쟁점은 단일한 공약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본 규칙을 복원할 수 있느냐로 모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