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간학자 윤태경의 '미래와 인간'] ⑪배를 산으로 몰고 간 공자의 한마디
[미래인간학자 윤태경의 '미래와 인간'] ⑪배를 산으로 몰고 간 공자의 한마디
  • 윤태경 고문
  • 승인 2020.08.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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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경 미래인간학자
윤태경 미래인간학자

 

<조선의 종말 사생관을 낳은 공자의 한마디>

논어에 제자 계로(季路)가 스승 공자에게 귀신 섬기는 것과 죽음에 관해 묻는 내용이 나온다.

▲계로: 귀신을 어찌 섬겨야 합니까? (問事鬼神)

▲공자: 사람도 제대로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능히 섬기겠는가? (未能事人, 焉能事鬼?)

▲계로: 감히 죽음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敢問死)

▲공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未知生, 焉知死?)

계로는 자로(子路)를 말한다. 계로의 귀신 섬기는 질문은 제사와 관련된 질문이다.

이에 공자는 살아 있는 사람도 잘 모시지 못하면서 어찌 죽은 귀신을 모신다고 말하느냐? 라고 반문한 것이다. 계로는 스승의 이 대답이 미심쩍어서인지 죽음에 대해서 추가 질문을 한다. 공자는 같은 맥락에서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한다. 공자의 짧은 한마디에 ‘귀신과 죽음’에 대한 공자의 생각이 압축돼 있다. 공자는 ‘귀신과 죽음’에 대해 정면으로 설명해주지 않고 빙빙 돌린다. 제자의 질문을 원천봉쇄하면서 오히려 계로를 ”쓸데없는 것을 물어본다‘라며 나무라는 투다.

공자와 제자들. 출처: silkqin
공자와 제자들. 출처: silkqin

공자의 이런 견해는 후세로 이어져 제자나 추종자들에 의해 ’내세는 없으며 현세 지향적인 삶을 중시하라‘는 가르침을 낳았다. 내세가 없으니 사후세계도 없으며, 당연히 영혼도 없고 ’죽으면 끝’이라는 종말론적 사생관(死生觀)을 낳았다. 공자와 공자의 제자, 후학들의 ‘죽으면 끝’이라는 종말론적 가르침은 조선의 사생관(死生觀)이었다.

공자나 맹자, 주자의 생각을 중국인들보다 더 충실히 따르려고 했던 조선은 유교 종주국 중국보다 훨씬 교조적인 유교 국가였다. 세계 최고의 폐쇄적 유교관을 가진 나라가 되어버렸다. 수백 년 묵은 폐쇄적 사생관(死生觀)은 그렇게 해서 현대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정서적 메인스트림으로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죽음 = 끝, 종말’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잘못된 사생관(死生觀)이다. 잘못된 사생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불필요한 고통이 반복된다. 죽음은 시행착오 후 개선이 허용 안 되는 육체의 원천적 종말이기 때문이다.

‘뭐 공자 말이 맞잖아. 뭐가 잘못됐다고 하지? 공자는 산 사람도 잘 못 모시면서 죽은 사람 모시는 문제를 꺼내지 말라라는 것이고, 삶도 잘 모르면서 죽음을 입에 담지 말라는 말도 옳은 말 아니냐?’이라며 이해를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많다.

<귀신과 죽음에 대해서는 빈틈 많은 공자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은 뭔가 빈틈이 있고 허전하다. 공자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인데, 사후세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제자의 질문을 회피한다는 것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인생과 삶에 대한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은 사상가 철학자들에겐 흔한 질문이고 당연한 질문이다. 그런데 공자는 제자의 궁금함을 해소해주거나, 더 깊게 통찰해보도록 과제나 화두를 주는 것도 아니고 질문을 원천봉쇄하면서 오히려 힐난하고 있다.

공자의 답이 이런 식이면 다음과 같은 질문성 답변도 가능하다. 질문할 가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문답이 되어버린다.

“천문학자에게, 태양계도 잘 모르면서 무슨 우주를 연구한다는 것이냐?

”우주비행사에게, 지구도 다 여행해 보지 못했으면서 무슨 우주여행?

“해외여행자에게, 국내 여행도 다 못했으면서 무슨 해외여행?

”결혼하려는 사람에게, 남자(여자)도 다 모르면서 무슨 결혼?

“출산하려는 부부에게, 아이나 육아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출산?

“(당시는 수명이 짧았음) 삶을 제대로 알려면 100살을 살아도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데 그러면 삶은 언제 다 알 수 있느냐? ” 등등

이외에도 대답하기 어렵거나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고 싶을 때 공자처럼 반문한다면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데 도움은 될지 몰라도,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 공자의 대답은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현세의 삶을 충실히 다 살고 난 뒤는 어찌 되는가? 에 대한 궁금함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공자는 질문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한 것이다.

공자의 ‘귀신과 죽음’에 대한 답변은 뚱딴지같고, 배를 산으로 몰고 가는 듯한 답변이다. 공자의 한마디 가르침이 한국인의 후진적인 사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기존의 사생관이 쉽게 바뀌지 않은데는 현대 과학도 한몫하고 있다. 현대 과학은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영혼이 따로 있어서 사후세계가 있다거나 다시 태어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인다.

< ‘죽으면 끝’ 생각은 소멸의 공포를 낳는다>

유교적 분위기와 과학적 입장이 상호 공명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생관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견해를 따르면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죽음에 대해 무서움을 가진다. 소멸의 공포 때문이다. 그래서 죽지 않고 현재 상태로 있고 싶은 것이고 죽음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꺼리는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살아오다가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리거나, 암에 걸려 갑작스레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이른바 멘붕 상태에 빠진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진다는데 누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않겠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도의, 극한의 공포다.

가슴 아픈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대체 불가능이다. 원초적 상실, 원초적 소멸이다. 다른 대안을 찾는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없어진다.’라는 것이다. 내가!

출처: Needpix
출처: Needpix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주위에서 아파서 죽고, 교통사고 나서 죽고, 테러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과실로 죽고, 날마다 사람 죽는다는 뉴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그뿐이다. 죽어버린 지식이고 죽어버린 인식이다.

‘나도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는 ‘난 안 죽어! 죽는 것은 다른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굳건하다. 그래서 입으로만, 머릿속으로만 알고 정작 가슴으로는 못 느끼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다가 죽음과 마주치면 공포와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대부분의 인간이다.

모 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 분은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죽지 않으며 죽은 다음에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에 대해 “참 그럴듯한 말”이라면서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다. 말장난 비슷한 말이 뭐가 그럴듯한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철학적 사유를 오래 하신 분조차 죽음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라는 것이 아쉽다.

<잘 몰라서, 잘못 알아서 무서운 것이다>

완전한 무지라면 두려움이 없다. 잘못된 것이라도 100% 물샐 틈 없이 믿기 때문에 두려움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완전한 무지가 아니라 틈새가 있는 무지라면, 즉 머릿속으로 그렇게 이해를 해도, 가슴 한쪽에 혹시라도 아니면 어떡하지? 라는 빈틈이 있다면, 그 빈 곳에 가스처럼 스며드는 것이 죽음에 관한 생각이다.

제주 앞바다나, 남태평양 맑은 바닷물을 보면 밑바닥이 훤히 다 보인다. 수심이 깊어도 밑바닥이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스노클링(숨대롱)으로 물장구치며 놀더라도 두려움을 못 느낀다.

맑은 물속에선 시야가 확보돼 두려움이 덜 한 것이다. 반면에 수심이 얕아도 흙탕물이거나 시야가 흐린 물속에서는 두려움을 느낀다. 앞에서, 뒤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를 모르니 그런 것이다. 사물이 다 보이는 밝은 대낮보다는 불빛 없는 어두컴컴한 밤을 사람들은 더 무서워한다. 불빛 없는 밤에는 가는 길조차 무섭고, 사방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와 위협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출처: Max Pixel
출처: Max Pixel

그렇다! 인간은 무엇에 대해 지식이나 경험이나 정보가 없을 때 갑갑함과 두려움, 공포를 느낀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잘 못 알고 있다. 잘 몰라서, 알더라도 제대로 안 것인지 자신이 없어서, 어렴풋이 조금만 알아서, 우리는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잘못된 사생관으로 한국인이 맞고 있는 죽음의 질은 열악하고 후진적이다. 서구권 국가들과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죽음의 질 수준이 낮다. 잘못된 사생관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와 그 친지 유가족들이다. 잘못된 사생관으로 부모에 이어 자신도 차례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실감을 못 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남의 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저세상 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죽음의 질이 낮다는 것을 실감한다. 즉, 안 겪어도 될 고통을 온몸으로 다 겪은 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끝난다면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우주의 돌아가는 원리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가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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